'靑 습격' 北 무장공비 출신 김신조 목사 사망
남파 이유 묻자… "박정희 목 따러 왔다"
北에서 온 특수요원들이 '일요일' 노린 이유는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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01:20김신조 목사는요
01:22지난 2021년 채널A 프로그램에
01:24직접 출연을 해서
01:26이 사태와 관련해서 생생한
01:28증언을 했기도 했습니다
01:29일단 직접 듣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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02:01저희가 특별하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요
02:03썬킨 작가님 모셨습니다
02:05네, 어서오십시오
02:06사실 이렇게 직접 육성까지 듣고 나니까요
02:08이 1.21 사태라고 부르더라고요
02:10이 청와대 습격 사건, 이게 도대체 뭔지 궁금한데 일단 어떤 사건인지부터 짚어볼까요?
02:16일단 1968년이라고 하면 당시 베트남전이 한창 진행됐던 때였는데 미국이 슬슬 지기 시작했던 그때요.
02:23여기서 김일성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단 정찰총국 소속 특수부대,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인 게 뭐냐면
02:30정규 부대가 한국전쟁 이후에 처음으로 휴전선을 돌파한 사건이거든요.
02:34그래가지고 정찰총국 소속 31명의 정규 특수부대원들이 정말 빠른 속도로 청와대 근처까지 와가지고
02:41다행히도 거기서 검거가 된 사건인데 그때 이제 31명이 넘어왔거든요.
02:4731명이 넘어와가지고 29명이 사살되고 한 명이 북한으로 돌아갔고 한 명 생포가 된 사람이 김신조 목사시죠.
02:55그때 이제 기자회견을 생방송으로 했거든요.
02:58정말 깜짝 놀랐습니다.
03:00김신조 목사님이라고 할게요.
03:02김신조 씨가 저 채널A에 이제 만나러 갑니다.
03:05저 프로그램에 나오셔가지고 증언했는데 너무 긴장돼가지고 맥주를 한 잔 먹었대요.
03:09그래서 술이 약간 된 상태에서 기자들이 왜 대한민국에 넘어왔냐 그랬더니 솔직하게 얘기한 거예요.
03:18박정희 모가지 따로와 수다.
03:19이게 1파, 만파로 번진 그런 사건이었었죠.
03:22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의 무장공비 1, 2, 4 부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의 전무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.
03:30일단 사건이 발생하기 전 그날의 상황을 지도로 보면서 한번 따라가 볼 텐데요.
03:37이렇게 사건이 발생한 기 한 4일 전쯤으로 돌아가 볼게요.
03:41저녁 8시에 개성을 출발해서 이게 11시에 DMZ 철책을 돌파를 하고요.
03:47다음 날인 18일 10시에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임진강을 도화한 거예요.
03:53그렇습니다.
03:541월이면 엄동, 설안인 것도 북한이 다 알았을 건데 왜 이렇게 일찍 왔냐.
03:59나중에 설명드리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금 남한을 했지 않습니까.
04:031월 17일 저녁 8시에 일단 개성을 출발합니다.
04:06이 특수부대원들이, 31명이.
04:07그리고 같은 날 밤 11시에 휴전선 철책선을 뚫고 남한으로 침투를 하는데 밤에만 움직였습니다.
04:14밤에만요.
04:15그리고 18일 밤 10시에 흰색 모포를 몸에 두른 채 꽁꽁 언 임진강을 도강을 합니다.
04:21그냥 맨몸으로 온 건 아니겠죠.
04:23국군으로 일단 위장을 했고 엄동, 설안에 불 없이도 먹을 수 있는 오징어, 엿을 음식으로 준비를 합니다.
04:29당시에 PPS-43 기관단총과 TT-33 권총,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게 자폭을 위한 수류탄까지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.
04:37그렇게 자폭을 혹시나 만에 하나 자폭할 수도 있으니까 수류탄까지 챙겼다는 얘기예요?
04:42그러면 사실 겨울이라고 또 말씀을 하셨잖아요.
04:46그러면 1월이면 사실 이게 엄동, 설안인 거를 북한도 알았을 텐데 왜 이렇게 하필 추운 날씨에 건너온 거예요?
04:53김신조 씨가 직접 하신 말씀인데 뭐라고 했냐면 아주 단순합니다.
04:57겨울철이면 훈련을 안 할 것이다.
05:00그리고 활동도 드물 것이다.
05:02특히 도강을 해야 되는데 수영을 하면 안 되잖아요.
05:05그래서 꽁꽁 언, 임진강이 언, 그 겨울을 노렸다라고 말을 하셨습니다.
05:10그러니까 남측에서는 훈련을 안 하고 있을 때이고 굳이 건너서 올 필요가 없고 걸어서 올 수 있는 타이밍이 겨울이었다.
05:16그렇죠.
05:17그런 설명이신 건데 저희가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여쭤보기 위해서
05:21안혜경 전 북한군 특수부대원 출신인 저희 안혜경 씨 모셨는데
05:26북한에서는 그럼 이렇게 추운 날을 대비한 훈련 같은 것도 있습니까?
05:31특수부대에서?
05:32네, 맞습니다.
05:33북한군 하게 되면 동기학이라고 해서 훈련을 두 번으로 나눠서 하는데
05:37특히 1월 달부터 기본적인 동기훈련이 들어가거든요.
05:41그러니까 12월 1일 날 훈련 시작되는데 동기훈련이 이때는 한 달 동안은 실내에서
05:46교육을 하고 그 교육을 바탕으로 해서 1월 달부터는 전군이 동기훈련이 들어갑니다.
05:52어떤 훈련을 해요?
05:54특히 저희 같이 특수부대 같은 경우에는 일단 국복훈련, 혹한기훈련이라고 해서
06:03수영훈련도 하고요.
06:04더 추운 겨울에 수영훈련도 하고 그리고 산악훈련도 하고요.
06:07그리고 자기를 숨길 수 있는 그런 훈련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.
06:13위장훈련 같은 것도 많이 하고.
06:15그런데 아까 잠깐 썬킴 작가님이 설명을 해 주신 게
06:19자폭을 위한 수류탄을 가져왔다 이 얘기를 하던데
06:22북한에서 이런 자폭 교육 같은 것도 받는 거예요?
06:26북한의 병사의 임무 중에 열 번째가 그게 있어요.
06:30어떤 임무요?
06:31병사는 절대로 적에게 퍼러대지 말아야 된다라는 임무가 그게 딱 박혀있거든요.
06:37그래서 마지막 한 발은 본인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.
06:43그래서 특수부대원들이 우리가 늘 훈련할 때 자기 무기 중에 하나가 수류탄 무조건 다섯 개를 지참하고 있는데
06:51그 중에 하나는 본인을 위해서 쓸 수 있게끔.
06:54다섯 개 중 하나는?
06:55네.
06:56그리고 꼭 남겨놔야 되는 거예요?
06:57남겨야 됩니다.
06:58너무 잔인한 훈련이기도 한데요.
07:00그게 일단은 포로 그 자체가 북한에서는 반역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신 교육을 하고 있고
07:08또 그런 세뇌 교육을 군대에 나와서만 하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세뇌받았기 때문에
07:14어찌 보게 되면 숭배 아닌 정교적인 신격화 같은 그런 게 속했다고 해도 가언이 아니죠?
07:22그러면 계속해서 남아 3일째 상황을 한번 보겠습니다.
07:28그러니까 당시 19일에 오전 5시에 파주 삼봉산이라는 곳에 도착을 합니다.
07:35이게 그러니까 이틀째예요, 성킨 작가님.
07:37파주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럼 아무한테도 안 들킨 거예요?
07:40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해가지고 당시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우 씨 4형제에게 발각이 됩니다.
07:48나무를 하고 있던 산입니다.
07:49나무를 하고 있던 나무꾼이었었죠.
07:50당시 지침을 어떻게 받고 내려왔냐면 누구든지 발견하면 일단은 죽여라, 죽인 다음에 묻어라라는 그런 명령을 받고 내려온 상태였거든요.
07:58그런데 4명이 너무 많은 거예요.
08:00그리고 또 겨울이 하다 보니까 꽁꽁 언 땅을 어떻게 해도 팝니까?
08:03그래가지고 김신조 씨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 메시지를 보냈대요.
08:08어떻게 할 것인가?
08:09그런데 북에서 메시지가 왔어요.
08:12문제는 이걸 해석을 할 수 있는 난수표를 갖고 와야 되는데 그걸 안 갖고 온 거예요.
08:16지금 영상에 그 나무꾼 4형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네요.
08:20맞습니다.
08:21그래가지고 회의를 합니다.
08:22어떻게 할 것인가 회의를 하다가 살려주기로 결정을 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.
08:28어차피 우리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주도로 통일이 될 거니까 그때 만나자.
08:33진표로 내가 시계를 끌려줄 테니까 이거 받고 가라 했는데 우리나라의 반공교육을 약간
08:38무시했다고나 할까 이 4형제는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.
08:43아, 얕잡아봤군요.
08:44얕잡아봤죠.
08:44우리나라의 반공교육을.
08:45그러면 당시 무장공비를 직접 신고했던 지금 영상 속에 나오는 우 씨 4형제의 방송 인터뷰가 남아있더라고요.
08:54한번 직접 듣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.
08:56사실 저라면 총을 든 북한군과 마주쳤다 이러면은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요.
09:26그런데 대단한 건 저 우 씨 형제가 바로 신고를 했다는 거잖아요.
09:29그렇습니다.
09:30이제 당시에 썬킴 작가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나라의 반공교육에 대한 것들을 북한에서는 조금 무시했다.
09:39얕잡아봤군요.
09:40이렇게 적절했다라고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.
09:42당시만 하더라도 학교라든지 관공서 담벼락에는 반공방첩이라는 표가 붙었었고요.
09:48그다음에 길거리 어디에 가든지 자수하여 광명찾자.
09:52지금 우리가 흔히 농담 삼아 얘기하는 것이 그때 당시에 굉장히 구체적인 표어였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.
09:58그리고 곳곳에 간첩식별요령이다.
10:01이런 것들이 있었는데요.
10:02보통 보게 된다면 산에서 새벽에 내려오는 사람.
10:06이슬과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.
10:08그다음에 담배값을 모르는 사람.
10:10그러니까 세상 물적 모른다라는 거죠.
10:11그리고 괜히 주의를 살펴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이런 것들이 곳곳에 있다 보니까 저도 80년대 학교에서 반공포스터를 그렸던 기억이 나고 이런 걸 보면서 친구들하고 학생이니까 담배값을 당연히 모르죠.
10:22우리 간첩 아니야?
10:23이런 농담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 그런 분위기가 좀 있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죠.
10:29또 60년대에는 아무래도 산보다는 바닷가를 통해서 유입되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금음의 야간에 바닷가를 배회하는 사람.
10:37당시만 해도 생소한 스쿠버 장비를 갖고 있는 사람들 아니면 바닷가에서 신호를 보낸 사람.
10:43이런 사람들을 구체적인 간첩 그다음에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 이런 것을 발견하면 즉시 신고를 해야 된다.
10:51이런 어떤 사회적인 분위기가 우리는 그때 당시에 팽배에 있었다.
10:54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.
10:57당시에요.
10:58그러면 우리의 반공교육과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 영상을 저희 제작진이 발굴을 했다고 해요.
11:03뭔지 한번 영상 저희 보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.
11:07이 많은 사람의 물결 속에 간첩이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.
11:18여기 이 사람 소위 계급에 비해 나이가 너무 들어 보이는 것이 수상하지 않습니까.
11:26저런 영상들도 있었고요.
11:30그러니까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간첩이 있는 거 아니냐.
11:32이런 영상들도 있었고 또 대간첩 시범 작전 상황극 영상이 준비가 되어 있나요.
11:41보면은 이게 당시에 대한 뉴스로 보면은 저렇게 간첩들이 집으로 막 들어온다는 겁니다.
11:48저걸 막 일종의 흉내를 내서 저렇게 사람들한테 보여주면서 저런 간첩이 있을 수 있다.
11:53그리고 집에 저렇게 숨겨주는 사람들도 있다.
11:56이렇게 좀 설명을 하는 영상들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반공방첩 교육이 굉장히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겁니다.
12:07드디어 사건 발생 1일 1968년 1월 21일 새벽 5시에요.
12:12이들이 청와대 뒷산인 부각산까지 도착을 하게 됩니다.
12:18선킨 작가님 아무리 예전이어도 사실 부각산이면 사대문 내부가 거의 다 들여다보이는 서울의 중심이지 않습니까.
12:25그런데 이게 어떻게 들키지 않고 내려온 거예요.
12:28당시 침투의 기본은 낮에는 숨고 밤에 해가 지면 이동한다 이거였다고 하는데.
12:33그래서 이동 시간이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였다고 합니다.
12:38김신조 씨의 그 증언에 따르면 정말 끔찍한 지금 우리 상상이 안 되는 그런 방법이 이용이 됐다고 하는데.
12:46일단은 밤에 낮에 숨었다가 몰아내면 무덤 옆에 잠복을 한대요.
12:50구멍을 파요.
12:52관 옆에까지 갑니다.
12:54그리고 시신 옆에서 누워서 잠을 자요.
12:56낮엔.
12:57그리고 해가 지면 무덤에서 올라온다고 하는데 제가 물어봤거든요.
13:00무섭지 않으시냐고 옆에 시신이 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편했다고 해요.
13:06설마 여기까지 그 검거의 손길이 미치진 않을 것이다.
13:09해가지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이동하는 이런 행태를 보였는데.
13:16정말 어떻게 보면 기적에 가까운 그런 이동 스킬을 보였는데요.
13:2130km에 달하는 군장을 메고 산악 산속에서 시속 12km의 속도로 그냥 달렸다고 합니다.
13:2830km를 메고요?
13:2930km의 군장을 메고 시속 12km를 달린 거예요.
13:32말이 안 되는데.
13:33산에서.
13:34어떻게 그럴 수 있죠?
13:34경지도 아니라.
13:36아니 그러면 산악을 시속 12km로 30km를 메고 간다.
13:41이게 특수부대원 출신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보시는 일이에요?
13:43그게 기본입니다.
13:45기본이에요?
13:45기본입니다.
13:46그래서 저희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해서 토요일마다 행군 훈련, 야간 행군을 하거든요.
13:52그래서 야간 행군을 첫 주부터 3주 차까지는 야간 행군을 해가지고 그냥 한 50km, 그 다음 그 다음 주는 100km.
14:01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100km.
14:04그 다음에 이제 상반기, 하반기 해가지고 훈련 들어가서는 이제 천리 행군도 합니다.
14:10그래요?
14:10천리 행군이 뭐죠?
14:11천리하게 되면 천리를 킬로수로 따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?
14:14한 250km 되죠?
14:15그래요?
14:16그 250km를 계속 걸른 거예요.
14:18아까처럼 낮에는 위장에서 들어가 있고 밤에만 움직이면서 지도 잡혀보면서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잡혀에 가야만 내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보충받고 그걸 못하게 되면 굶으면서 다음 접선 장소까지 가야 되고 이런 훈련을 주기적으로 계속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죠.
14:39그러면 이 김신조 사건을 원래부터 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 12km로 내려온다는 얘기를 들으셨을 때 별로 놀랍지 않다 이런 반응이 있었을 것 같아요.
14:48그럼요. 이거는 기본적인 북한의 특수부대 훈련이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죠.
14:52그럼요? 일상적인 거였죠?
14:54네. 일상적인 훈련이고.
14:55그래서 북한군 하게 되면 제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놀라웠던 게 군인들이 버스 타고 이동하는 걸 보고 정말 놀라웠어요.
15:02아니, 총탄이 터지는데 언제 버스가 운행을 할 수 있지 도로 다 파괴됐을 텐데 그런 생각을 제일 많이 했습니다.
15:10저희는 계속적으로 행군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군대가 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게 정말 놀라웠어요.
15:16또 그런 일화까지 관련해서는 퀴즈가 또 준비되어 있다면서요.
15:19네, 그렇습니다. 어찌 됐든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을 띄고 왔을 텐데요.
15:26그런 인물을 생각한다면 이것저것 많이 생각을 하고 날짜도 생각을 했을 겁니다.
15:311, 2일 사태 당시 땡땡땡을 노렸다.
15:35이 땡땡땡이 정말 심사숙고에서 결정한 땡땡땡이었다라는 힌트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.
15:411, 2일 사태 당시 땡땡땡을 노렸다.
15:45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건데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은 아니죠.
15:49이름 세 독자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땡땡땡을 노렸다.
15:51저는 정답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하려고 했는데.
15:55네, 그건 아니었습니다.
15:56일단 답은 아니라고 하십니까? 정답이 뭐죠?
15:58정답은 일요일이었습니다.
16:00일요일이요?
16:01우리가 이제 6.25 사태도 일요일 날 일어난 거 아니겠습니까?
16:0568년 1월 21일도 당시에 일요일이었습니다.
16:09일요일이다라고 한다면 앞서 우리가 겨울이라고 하면 군대에서 훈련을 하지 않는다.
16:14않을 가능성이 있다. 그렇게 얘기한 거 아니겠습니까?
16:17아무래도 일요일이라고 한다면 더군다나 일요일 밤이었기 때문에
16:21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경계라든지 이런 것들이 많이 느슨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죠.
16:25또 결정적인 게 있습니다.
16:27다음 날이 대학 입시 시험일이었습니다.
16:30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대학 입시 수능을 할 때는 비행기도 멈추고 기차도 멈추고 온 국민들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?
16:38다음 날 시험을 앞두고 어떠한 일들을 일을 벌리지는 못했을 그런 상황들이라는 것을 북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
16:47특히 일요일 밤 그중에서 겨울 그리고 대학 시험 전날 이 날을 노렸다는 것은 정말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 결정적인 날을 잘 선택했다.
16:59좀 역설적으로 이렇게 좀 말할 수도 있겠죠.
17:02선키 작가님 6.25 전쟁도 일요일에 일어났다 이런 얘기가 있던데 맞나요?
17:06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발발을 했죠.
17:08그래서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요일에는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했다고 해요.
17:17확인도 안 해보고 그래서 일요일을 전퇴근을 했다고 하죠.
17:20또 그런 얘기가 있군요.
17:21어쨌든 다시 한번 그러면 경로를 이제 짚어보면요.
17:25목표가 코앞까지 온 겁니다.
17:27그러니까 이들의 목표라고 볼 수 있는 남측의 대통령을 암살하려면 청와대까지 가야 하는데
17:35어떻게 좀 청와대에 접근을 하려고 했습니까?
17:39작가님.
17:40일단은 1월 21일 새벽에 31명 북한 특수부대원들이죠.
17:44트렌치코트를 입고 청와대 근처까지 옵니다.
17:47일단은 그때 어떤 마크를 붙였냐면 CIC라고 해서 유군 방첩부대의 마크를 붙였거든요.
17:51유군 방첩부대는 당시에는 신분을 밝히실 필요도 없고 내가 어딜 간다 얘기할 필요도 없거든요.
17:58그래서 일단은.
17:58남측의 유군 방첩부대.
18:00우리 남측 부대에 CIC 마크를 달고 이동을 했습니다.
18:04그래서 검은할 때마다 우리는 CIC 부대원들이고 지금 특수작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
18:08어디서 왔고 어디 가고 지금 목적지 알 필요도 없다.
18:11알려고도 하지 마라.
18:12이런 식으로 통과를 통과를 했다고 합니다.
18:14그리고 청와대 바로 300m 코앞까지 접근을 합니다.
18:18이때 무전을 받았던 당시 종로경찰서의 최규식 경찰서장이
18:23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군 생활을 할 때 부관 출신이거든요.
18:27아무리 봐도 저 CIC라고 주장하는 저 부대원들 뭔가 이상하다 해서 직접 간 거예요.
18:33CIC 당신들 좋다.
18:35어디 가는지 밝혀라.
18:36실랑이를 벌이다가 북측 특수부대원들이 발포를 했습니다.
18:41그래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안타깝게 현장에서 사망을 하시고 교전에 벌어집니다.
18:47그런데 이때 정말 큰 민간인 희생이 발생을 해요.
18:51밤이었거든요.
18:53저 멀리서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는데
18:55이 무장 공비들은 이것이 우리 측에서 증파된 지원 병력으로 한 거예요.
19:01안 보이죠.
19:02헤트라이트만 보이니까.
19:04그래가지고 민간인들이 타고 있던 이 비무장 시내버스에
19:07무차별 사격을 하고 수리탄을 던져가지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을 했습니다.
19:12지금 저 자료 화면으로 나오는데 저렇게 민간인 피해가 결국에 안타깝게 또 발생을 하고 만 건데
19:20이후에 이 무장 공비들은 그럼 어떻게 좀 소탕을 하게 됐나요?
19:23교정이 벌어지니까 무장 공비들이 인근 산으로 이제 도주를 했습니다.
19:28인근 산이라고 한다면 인안산하고 부각산 비봉.
19:32그러니까 이제 청와대 중심으로 보면 양쪽 산이거든요.
19:36지금 이제 등산도 많이 가는 그런 곳인데
19:38부각산과 인안산 이렇게 이제 붙어졌다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.
19:43그러다 보니까 우리 이제 남한 측에서는 수방사하고 육사단 그리고 특전사를 투입을 하고
19:51서울 시내 전 경찰을 소집을 합니다.
19:53그래서 무려 열흘 가까이 정확히는 8일 동안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들을 펼치게 됩니다.
20:00그러다가 앞서 서두에도 말씀드렸던 31명 중에 29명이 사살되는 상황이 벌어졌고요.
20:07이제 한 명은 이제 생포된 분은 김신조 씨고 한 명은 행보입니다.
20:12이제 아무래도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는데 그 상황은 아직까지도 밝혀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
20:18밝혀진 건 아니고 이제 북한에서는 넘어왔다라고 얘기를 하는 건데
20:22그 부분은 이제 어찌 됐든 행볼 우리나라 공식 발표에 의하면 행방불명이다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.
20:28김신조 씨가 이제 생포된 곳이 인안산 쪽인데요.
20:32아마 부각산 쪽으로 갔다라면 북한 쪽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죠.
20:36왜냐하면 부각산이 계속해서 이제 북쪽으로 연결된 거고
20:39인안산 같은 경우 독립된 사안이다 보니까 이제 밤이고 그러다 보니까 인안산 쪽으로 가서 거기서 생포를 됐습니다.
20:46그랬던 상황인데 지금 이제 사진을 보게 된다라면 지금 이제 화면을 보게 된다라면
20:52당시에 29명이 이제 사살이 됐기 때문에 29명이 과연 무장공비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?
20:59김신조 씨가 이제 저 현장에서 저게 맞는지 확인하는 그런 영상을 지금 보고 계신데요.
21:05어찌 됐든 이렇게 돼서 1월 29일 날 공식적으로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 불리웠던
21:101, 2일 사태는 종료가 됐다.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.
21:14그러니까 당시에 근데 김신조 씨도 입장을 밝힌 걸로 알고 있는데
21:18어떤 좀 입장을 좀 구체적으로 밝혀주신가요?
21:20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좀 안타까운 그런 부분들이다라고 좀 얘기를 했고요.
21:24김신조 씨가 이제 그 뒤에 우리나라에서 이제 전향을 해서 일반적인 생활을 했는데
21:30당시에 총을 한 발도 발사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.
21:33그런 것들 때문에 나중에 이제 신문 과정에서 이제 그렇게 얘기를 했고
21:37당시에 자기는 이제 북한의 어떤 그런 교육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제 남아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데
21:44그것을 이제 후회하고 참여한다.
21:46그래서 이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.
21:48이러한 회고록도 남긴 상황입니다.
21:50자 그런데 한 명은 행방불명됐다.
21:53뭐 북으로 돌아가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라고 했는데
21:56자 그러면 북한에서는 그 한 명의 신원을 알고 있는지도 궁금하고
22:00북한에서 당시에 이 사건을 알고 있겠어요?
22:03아니요. 이 사건은 저 역시도 대한민국이 와서 알았습니다.
22:07이러한 사건은 철저히 북한이 감추는 게 뭐냐면
22:10우리가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6.25도 북한이 먼저 일으켰잖아요.
22:15우리를 내려왔는데 그것도 대한민국이 미국과 짝짝꿍게 해가지고
22:2016개 추정국가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쳤기 때문에 중국하고 러시아가 도왔다.
22:25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.
22:26그래서 이러한 사건도 북한이 먼저 내리다.
22:29도발을 했기 때문에 절대로 북한은 주민들에게 그리고 군인들에게 우리는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.
22:35자의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지키고 하는데 항상 남조선이 먼저 우리를 치기 때문에 이런 거다라고 하기 때문에
22:41이런 거는 군인들한테 절대 밝혀주지 않죠.
22:44그럼 언제 처음 알게 되셨어요?
22:45대한민국이 와서 알았고 이 당시 보게 되면 푸에블러 사건도 있었지 않습니까?
22:49그런데 그거는 북한에서 한창 떠들고 있었어요.
22:52그래서 역사 교과서에도 푸에블러 사건은 나오지만 이 사건만큼은 안 나옵니다.
22:57푸에블러 같은 경우에는 북한이 영예를 침공했기 때문에 침해했기 때문에 우리가 나포했다.
23:03이렇게 가르치고 있거든요.
23:04그래서 이런 것들은 가르치지만 자기들이 잘못한 건 절대 안 가르친다라는 거죠.
23:10그런데 관련한 시신들이 파주에 남아있대 이런 얘기들도 있어요.
23:13네.
23:14저도 안타깝게 북한, 어찌 됐든 이 사람들은 북한을 위해서 자기의 청춘을 바친 거잖아요.
23:22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자기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끝내는 이 사건이 아직까지도.
23:28지금 저렇게 우리의 시신들이 그대로 남측에 남아있네요.
23:30남겨져 있다라는 게 정말 이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위해서, 목숨을 바치면서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국가는 이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잖아요.
23:39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볼 때 정말 북한 지금의 군인들이 이러한 사건을 알게 되면 누가 과연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는가라는 생각도 해봅니다.
23:50그러면 이러한 난파 훈련이라고 해야 될까요?
23:54이런 거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면서요?
23:56그럼요. 계속되고 있습니다.
23:57어떻게 일어나죠?
23:57북한이 전 무력부 쪽으로 지금 한 10개 여단의 저격경보를 가지고 있거든요.
24:04각 군단마다.
24:05그런데 이런 군단마다의 자기 지역이 있기 때문에 저는 2군단 32경보였습니다.
24:11그래서 2군단을 보게 되면 종합훈련장이 있는데 저희는 청와대에 가상 모형이 있었습니다.
24:17가상 모형이요?
24:18네. 가상 모형이 있었고 그걸 주 타격점으로 해가지고 늘 훈련을 해왔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.
24:25지금 저 영상에 나오는 게 저 청와대의 모습이 잠깐 언뜻 비치네요.
24:28네. 이렇게 허호볼판에서 뛰어내려가지고 타격 지점을 해서 얼마에 어떻게 정확하게 신속하게 하는가.
24:36이런 훈련을 계속적으로 주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.
24:40그러면 지금도 계속하고 있겠군요.
24:42지금도 계속하고 있고 또 얼마 전에도 김정은이 앞에서 이렇게 모범 훈련하는 모습도 보여줬고.
24:48그런데 사실 제 입장에서 봤을 때는 좀 옛날 구시대적인 훈련 같기는 하거든요.
24:53네.
24:53요새도 저렇게 훈련을 좀 할까요?
24:56요즘도 저렇게 하는데 저거를 구시대적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북한은 이거를 우리가 생각할 때는 구시대적이지만 북한에서는 게릴라전이라고 하거든요.
25:06그래서 게릴라전에 맞는 그 작전을 수행한다라고 군인들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현대적인 장비에 어찌 보게 되면 북한 군인들이 그냥 총알바디나 같은 거죠.
25:19그렇군요.
25:20이런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태로요.
25:24다시 우리 국민들의 충격도 매우 컸습니다.
25:26결국 이로 인해서 국민들 피부에 와닿는 굉장히 많은 변화들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관련해서 퀴즈가 준비되어 있다고요.
25:34111 사태 이후에 땡땡땡땡땡이 만들어졌습니다.
25:38굉장히 오래전 얘기인데요.
25:40땡땡땡땡땡은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갖고 계신 겁니다.
25:44우리가 모두 갖고 있는 것.
25:46그러니까 일종의 신분을 간첩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위해서 주민등록증 이런 거 아니에요?
25:53그렇습니다. 신분을 확인한 주민등록증이 구체적으로 발급됐다는 거죠.
25:59주민등록법은 법상은 1962년도에 만들어졌습니다.
26:03그래서 주민 감시라든지 통제 이런 부분들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주민번호.
26:08우리가 지금 주민번호는 다 외우고 있지 않습니까?
26:11군대 가면 총본 외우고 남자분들은 그다음에 일상생활하면 주민등록번호 다 외우고 있는데 당시에 주민등록번호는 부여되지 않았어요.
26:18그런데 지금은 13자리인데 12자리 당시만 해도 12자리 작성법이 법으로 명시가 돼 있었습니다만 이런 것들을 발급하지 않다가
26:26이 사태 이후에 주민등록증이 구체적으로 발급이 됐습니다.
26:32저렇게 박정희 전 대통령도?
26:331호 수영자가 박정희 대통령이고 2호가 유경수 여사님이십니다.
26:39그래서 그 당시 구체적인 박정희 대통령하고 유경수 여사님의 주민등록번호로 신문에 나왔었어요.
26:45지금처럼 이게 개인정보보호법에 있는 때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아이러니한.
26:51번호까지 다 나온 거예요?
26:51네, 번호. 박정희 대통령이 주민등록번호 불러드릴까요?
26:55아니요. 괜찮습니다.
26:56이럴 정도로 이게 일면에 당시에 실릴 정도로 되었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1번이시고 유경수 여사님은 2번이시고
27:04지금은 3번과 4번까지도 했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죠.
27:08또 이것뿐만이 아니라 상황도 바뀌었습니다.
27:12지금 현재 우리가 부각스카이웨이길이라는 게 7km 정도 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청와대 주변에 있는 산은 사람들이 왕리할 수 없었던 상황들인데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무장공비들이 들어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해서 부각스카이웨이길이 만들어졌고 인왕산스카이웨이길도 만들어졌습니다.
27:32그렇지만 이 길 이외에는 우리가 산책하거나 그런 것들이 있지 않았었는데
27:382022년에 전면적으로 개방이 됐고 거기에 가보시면 그때 당시에 충격을 했었던 나무들 그다음에 돌 총알이 맞았던 거기에 표시가 돼 있고 표시목도 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.
27:53이러면 우리 군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.
27:56변화가 있었죠.
27:58일단은 무장 공비죠.
28:01공비 31명이 바로 청와대 코앞에서 300m까지 왔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.
28:06그래가지고 군에 변화를 주자라는 움직임 하에 일단은 향토예비군이 그때 창설이 됩니다.
28:13그러니까 1, 2, 1이니까 1월 달이잖아요.
28:153개월 후에 4월 달에 향토예비군이 창설이 되고 당시 군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이었는데 6개월 늘어서 3년이 됩니다.
28:23김신조 씨가 직접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나중에 전향에서 나와가지고 길거리에서 그렇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대요.
28:32당신 때문에 내가 6개월 더 공복무를 했다고.
28:35그리고 또 우리 앵커님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교련.
28:40대학교와 고등학교의 교련 수업이 그때 추가가 됩니다.
28:43그렇군요.
28:43그리고 광화문 앞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이때 건립이 됩니다.
28:47광화문에 있는 지금 이순신 동상이요?
28:49네. 1, 2사건 이후에 만들어집니다.
28:51지금 영상에 나오는 저 교련 과목도 그 이후에 생겼다.
28:54네. 그 이 사태 이후에 만들어졌죠.
28:56그런데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실 김신조 씨는 전향을 해서 남한 사회에 정착을 하게 됐고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셨는데.
29:07어쨌든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지냈지만 사실 전향했다고는 하지만 무고한 시민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에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.
29:17그렇죠. 아까 언급된 것과 같이 일단은 당시에 체포됐을 당시에 검거됐을 당시에 총신에도 화약 냄새가 안 나고 총알도 장전이 된 상태 그대였기 때문에 총을 쏘지 않았다.
29:28이래서 사형을 면했다고 해요.
29:30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받아준 다음에 전향을 하시고 나중에 목사님이 되셨는데 김신조 씨가 생전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.
29:39뭐냐면 남북한 희생자 모두가 다 2, 30대 젊은이였는데 정말 아까운 목숨이다.
29:44정말 내가 이 한국 사회를 위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 내가 희생하고 이 죄값을 내가 치르고 살겠다라는 말을 했죠.
29:53그러면 작가님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 우리는 좀 뭘 기억을 해야 할까요?
29:58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. 김신조 씨도 그렇고 당시에 모든 특수부대원들이 다 왜곡된 북한 체제의 희생지 않았습니까?
30:06그래서 김신조라는 개인은 용서를 하되 그가 했던 행동은 우리가 꼭 기억하고 우리가 가슴 속에 새겨넣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.
30:17뭘 우리가 좀 기억을 해야 할까요?
30:20일단 우리가 방심하게 되면 언제든지 북한군은 늘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방심은 군물이다.
30:28방심하는 순간 우리가 지금의 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지옥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.
30:36네, 또 이렇게 우리 지금 사회에 대한 제언까지 주셔서 저희 지식 배터리 80에서 100%로 또 완충됐습니다.
30:43이야기 마스터 세 분과 함께 김신조 그리고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서 과거와 미래에 몰랐던 이야기 한번 살펴봤습니다.